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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반, 아라라트산의 품에서 피어난 아르메니아의 시간 여행지.(서론, 카스카드, 민족의 아픔, 일상 속 여유, 결론)

by cherryblossom6938 2025. 6. 22.

서론

*예레반(Yerevan)*은 아르메니아의 수도이자 가장 오래된 도시 중 하나로, 기원전 8세기 우라르투 왕국 시대부터 이어져 온 깊은 역사와 문화를 품고 있다. 아라라트산의 기품 있는 자태를 배경으로 펼쳐진 이 도시는, 고대와 근현대, 그리고 현재가 한 공간 안에서 자연스럽게 공존하는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대도시답게 활기차면서도, 천천히 흐르는 시간의 결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예레반은 여행자에게 단순한 ‘볼거리’를 넘어 깊은 사색과 감정을 선사하는 도시다.

예레반은 유럽과 아시아의 문화가 교차하는 지정학적 위치 덕분에 오랜 세월 수많은 제국과 세력의 영향을 받았으며, 그로 인해 다양한 건축 양식과 예술, 종교, 음식 문화가 도시 곳곳에 살아 있다. 고대 성채에서부터 소련 시대의 모더니즘 건축, 현대식 미술관과 광장에 이르기까지, 이 도시의 풍경은 시대의 켜가 겹겹이 쌓인 살아 있는 역사서와 같다.

하지만 예레반은 단지 과거의 흔적에 머물지 않는다. 소규모 창작자와 예술가들의 활동, 도시 전역에서 열리는 축제와 공연, 새롭게 문을 연 카페와 갤러리 등은 이곳이 현재도 생동감 넘치는 창조적 도시임을 보여준다. 소박하면서도 깊이 있는 정서, 낯설지만 따뜻한 환대, 그리고 도시 자체가 주는 진중한 아름다움이 어우러진 예레반은 많은 이들에게 ‘떠나고 나서야 비로소 그리운 도시’로 남게 되는 공간이다.

카스카드와 공공 예술, 예레반 중심부에서 만나는 문화적 자존심

예레반의 심장부에는 *카스카드 컴플렉스(Cascade Complex)*라는 특별한 건축물이 자리하고 있다. 이는 단순한 계단 구조물이 아니라, 예레반의 도시 정체성을 상징하는 복합 문화 공간이자 대중 예술의 중심지다. 계단을 따라 오르내리며 도시의 전경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으며, 내부에는 조각공원, 예술 전시관, 현대미술관까지 들어서 있어 도보 여행자에게는 이보다 좋은 문화 체험 공간이 없다.

카스카드 외에도 *공화국 광장(Republic Square)*은 예레반의 또 다른 상징적 공간이다. 밤이 되면 분수 쇼와 음악 공연이 어우러지며, 지역 주민들과 관광객들이 함께 모여 시간을 보내는 살아 있는 광장이다. 이곳을 중심으로 국립역사박물관, 아르메니아 갤러리, 대형 호텔 등이 모여 있어 자연스럽게 문화와 상업, 공공 공간이 조화를 이루는 풍경을 연출한다.

예레반은 이러한 중심지 외에도 거리 곳곳에 조형물과 벽화, 지역 예술가들의 설치미술이 가득하다. 단순히 건물 외벽을 장식하는 것을 넘어, 사람들의 기억과 메시지를 공유하는 미디어로 기능하는 이들 작품은 예레반을 ‘예술 도시’로 느끼게 만든다. 소련 시절의 냄새가 남아 있는 콘크리트 건물 사이로 피어나는 창조적 감각은 예레반만의 매력이자, 아르메니아인들이 지닌 문화적 자존심의 표현이다.

종교와 민족의 아픔을 품은 영혼의 도시, 메모리얼과 박물관들

아르메니아는 세계 최초로 기독교를 국교로 채택한 나라로, 예레반 역시 종교적 의미와 신앙의 흔적이 곳곳에 배어 있다. 하지만 이 도시의 진정한 깊이는 단순한 종교적 상징을 넘어, 민족적 고통과 그 극복의 서사를 품은 장소들에서 더욱 진하게 드러난다. 대표적인 곳이 바로 *아르메니아 집단학살 추모관(Tsitsernakaberd Memorial Complex)*이다.

1915년 오스만 제국에 의해 자행된 아르메니아 집단학살은 세계사에서도 가장 끔찍한 비극 중 하나로 꼽힌다. 예레반 외곽 언덕에 위치한 이 추모관은 조용하고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수많은 생명을 기리며, 전시관에서는 생존자들의 증언과 사진, 기록 자료를 통해 그 시대의 진실을 직면할 수 있다. 도시 자체가 아픔을 기억하고 이를 잊지 않기 위한 공간을 만들어 냈다는 점에서, 예레반은 단순한 과거의 유적지를 넘어서, 민족 정신의 중심지로 기능한다.

이 외에도 *마테나다란(Matenadaran)*이라는 고문서 보관소 겸 연구기관은 아르메니아 문명의 지적 유산을 집약한 장소다. 이곳에는 수천 년 전부터 이어져 온 종교 문서, 의학서, 과학 기술 문서들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으며, 아르메니아어와 다른 언어로 쓰인 다양한 필사본이 전시되어 있다. 단순한 도서관이나 박물관이 아니라, 아르메니아 민족의 문명사적 자존심이 담긴 신성한 공간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공간들은 예레반을 ‘살아 있는 기억의 도시’로 만들어주며, 여행자에게도 깊은 사유의 시간을 선사한다.

일상 속 여유와 감성이 흐르는 도시의 풍경과 사람들

예레반의 또 다른 매력은, 그 고요한 일상 속에서 흐르는 여유와 따뜻함이다. 도시를 걷다 보면 누구나 마음을 놓고 머물 수 있는 벤치 하나, 나무 그늘 아래에서 책을 읽는 노인, 길가에서 아이스크림을 파는 상인, 그리고 차분히 음악을 들으며 노을을 바라보는 젊은이들의 모습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빠르게 움직이는 것이 미덕인 대도시들과는 달리, 예레반은 천천히 살고, 진심을 나누는 문화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도시 전역에는 분위기 있는 카페와 와인바, 베이커리가 즐비해 있으며, 대부분의 공간이 상업적인 목적보다는 사람 간의 대화와 교감을 위한 장소로 꾸며져 있다. 커피 한 잔에 몇 시간을 보내는 것은 일상이며, 낯선 여행자에게도 자연스럽게 말을 거는 현지인들의 친절함은 오히려 한국이나 서유럽보다 더 따뜻하게 느껴진다. 특히 저녁 무렵, 시내 중심의 *노던 애비뉴(Northern Avenue)*를 따라 산책을 하다 보면 도시의 리듬에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또한 예레반은 음식 문화가 뛰어난 도시이기도 하다. 전통적인 조지아 요리와 페르시아, 러시아, 터키의 영향을 받은 다양한 요리가 어우러진 이곳에서는, 맛과 향, 정성이 모두 깃든 식사를 경험할 수 있다. 특히 현지 재료로 만든 케밥, 돌마, 라바쉬 빵, 매콤한 조지아식 수프와 다양한 와인은 여행 중의 피로를 잊게 만들어준다. 예레반은 ‘맛있는 도시’, ‘휴식이 가능한 도시’, 그리고 ‘사람 냄새 나는 도시’로서의 풍경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결론

예레반은 단지 아르메니아의 수도라는 타이틀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것은 한 민족의 고통과 희망, 신앙과 예술, 기억과 미래가 어우러져 만들어낸, 유일무이한 시간의 도시다. 구시가지의 석양과 카스카드의 도시 풍경, 집단학살 추모관의 침묵, 카페의 웃음소리까지—모든 것이 조화를 이루는 예레반은 여행자에게 단순한 ‘관광’이 아닌 ‘체험과 공감의 여정’을 선사한다.

예레반을 방문한다는 것은 단순히 이국적인 풍경을 담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고요하지만 강인한 민족의 역사 속을 걷는 일이자, 잊혀진 서사와 감정을 다시 꺼내어 보는 일이며, 낯선 이들 속에서 익숙한 따뜻함을 발견하는 순간들로 가득한 여정이다.

이 도시의 시간은 빠르지 않지만 깊고, 공간은 크지 않지만 밀도 높다. 예레반은 ‘한 번 다녀오면 된다’는 도시가 아니라, 떠난 후에도 계속 마음속에 남아 질문을 던지는 도시다. 그렇기에 이 도시는 단순한 여행지가 아니라, 삶의 이정표 같은 장소로 기억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