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바쿠(Baku)*는 아제르바이잔의 수도이자, 카스피해 연안에 위치한 유라시아의 관문 도시로 독특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 중동과 유럽, 중앙아시아의 경계에 걸쳐 있는 이 도시는 역사적으로도 수많은 제국과 문명의 교차점이었으며, 지금도 그 흔적이 도시 전역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바쿠라는 이름은 고대 페르시아어로 '신의 바람' 또는 '강한 바람'을 뜻하는데, 이는 실제로도 강한 해풍이 자주 불어오는 이 지역의 기후적 특징을 반영한다. 하지만 바람보다 더 강한 인상을 남기는 것은, 이 도시가 가진 역사적 깊이와 미래지향적인 도시 디자인, 그리고 문화적 복합성이다.
과거 실크로드의 중심지였던 바쿠는 19세기 석유 산업의 중심지로 급성장하면서 세계적으로 주목받게 되었다. 이후 소련 시절 산업화의 중심이었고, 현재는 유럽과 아시아의 에너지 허브로서 전략적인 위치에 자리 잡고 있다. 바쿠는 과거와 현재, 전통과 현대, 이슬람과 서구 문화가 자연스럽게 섞여 있는 도시다. 구시가지에서는 중세의 분위기를, 신도시에서는 최첨단 건축의 아름다움을 동시에 느낄 수 있으며, 이는 바쿠를 단순한 관광지를 넘어서 체험과 사색의 도시로 만든다.
이 도시는 최근 들어 더욱 주목받는 여행지로 자리잡고 있다. 포뮬러 1 그랑프리 개최지로도 알려진 바쿠는 관광 인프라의 발전과 함께 국제적인 매력을 더해가고 있다. 높은 수준의 호텔, 세련된 카페와 레스토랑, 현대적 쇼핑몰과 세계적인 박물관까지 두루 갖춘 이곳은 ‘동양 속의 유럽’, 혹은 ‘유럽의 끝자락에 있는 동양’이라는 수식어가 어울리는 이색적인 도시다.
구시가지 이체리 셰헤르에서 만나는 바쿠의 역사적 본질
바쿠 여행의 출발점은 단연 이체리 셰헤르(Icherisheher), 즉 구시가지다. 이곳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바쿠의 가장 오래된 지역으로, 고대 페르시아 시대부터 시작된 도시의 뿌리를 엿볼 수 있는 공간이다.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길을 따라 돌담과 고풍스러운 건물이 이어지며, 그 안에는 수백 년 전부터 이어져온 시장, 가정집, 모스크, 궁전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유적은 12세기에 지어진 *시르반샤흐 궁전(ShrivanShah’s Palace)*과 *마이든 타워(Maiden Tower)*다. 시르반샤흐 궁전은 당시 왕조의 중심지로, 이슬람 건축의 전형적인 아름다움과 아제르바이잔 고유의 예술성이 결합된 공간이다. 섬세하게 조각된 기둥과 천장, 지하 묘실, 작은 모스크 등은 중세 시대 아제르바이잔의 찬란한 문화 수준을 그대로 보여준다. 반면 마이든 타워는 수수께끼 같은 구조로, 다양한 전설과 해석을 품은 바쿠의 상징적 건축물이다.
구시가지에서는 도시의 과거뿐만 아니라 현재의 일상도 엿볼 수 있다. 전통 양탄자를 판매하는 상점, 수공예 공방, 터키식 찻집, 지역 주민이 모여 담소를 나누는 광장 등이 어우러져 살아 있는 박물관 같은 느낌을 준다. 도시가 고도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공간은 시간을 멈춘 듯한 매력을 지니고 있어, 바쿠의 진짜 얼굴을 보고 싶다면 반드시 방문해야 할 장소다.
현대 건축과 문화 예술이 어우러지는 신도시의 매력
바쿠는 구시가지의 역사성 못지않게, 현대적 감각의 도시 디자인으로도 주목받는다. 특히 도시 남부와 카스피해를 따라 형성된 신도시는 유럽 못지않은 세련된 도시 경관을 자랑하며, 바쿠가 단지 유산의 도시가 아닌 미래지향적인 메트로폴리스임을 보여준다. 그 중심에는 *헤이다르 알리예프 센터(Heydar Aliyev Center)*가 있다. 자하 하디드(Zaha Hadid)가 설계한 이 혁신적인 건축물은 곡선과 흐름이 강조된 디자인으로, 현대 건축의 정수를 보여주는 세계적 랜드마크로 손꼽힌다.
이 공간은 단지 외관만으로도 감탄을 자아내지만, 내부에는 박물관, 전시관, 공연장이 마련되어 있어 바쿠의 문화 예술을 체험할 수 있는 복합 문화 공간으로 기능하고 있다. 또한 바쿠 도심 곳곳에는 아제르바이잔 현대 미술관, 국립 카펫 박물관, 뮤직 아카데미 등 문화 기반 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어 도시를 걷는 것만으로도 예술과 지성을 체감할 수 있다.
도시의 해안선을 따라 조성된 *바쿠 불러바드(Baku Boulevard)*는 저녁 무렵 현지인과 관광객들이 함께 어우러지는 휴식의 공간이다. 넓게 펼쳐진 산책로, 분수광장, 놀이공원, 대관람차, 바닷가 레스토랑 등은 도시의 여유로운 일상을 그대로 보여준다. 여기에 카스피해 너머로 붉게 물든 노을이 더해지면, 바쿠의 밤은 하루 중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맞이한다. 전통과 미래가 공존하는 이 도시는 현대인의 감성과 깊이를 모두 만족시키는 특별한 여행지가 된다.
불의 나라 아제르바이잔의 정체성이 담긴 종교와 자연의 조화
‘불의 땅(Land of Fire)’이라는 별명을 가진 아제르바이잔의 정체성은 바쿠에서도 강하게 드러난다. 이는 지역의 지질 구조상 천연가스가 지표면으로 분출되어 자연적으로 불이 타오르는 현상에서 유래된 표현으로, 이러한 자연 현상은 종교적, 철학적 상징으로도 발전했다. 특히 조로아스터교의 영향을 받은 고대 아테쉬가흐 사원(Ateshgah Fire Temple)은 이 지역이 얼마나 오래전부터 ‘불’과 연결되어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다.
이 사원은 바쿠 외곽에 위치해 있으며, 고대 인도-페르시아 상인들에 의해 세워졌다. 불꽃이 끊임없이 타오르는 이 사원은 조로아스터교의 신성한 의식이 진행되던 장소로, 지금은 박물관으로 운영되며 종교적 다양성과 아제르바이잔의 고대 문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또한 바쿠 외곽에는 *얀나르 다그(Yanar Dag)*라는 ‘불타는 언덕’이 있다. 이곳은 지하에서 솟아오르는 천연가스에 의해 언덕 일부가 항상 불타고 있는 독특한 지형으로, 자연과 인간 신앙이 연결된 상징적인 장소다. 바쿠는 이처럼 자연의 경이로움과 인간의 철학이 공존하는 공간이며, 도시 여행을 넘어 지질과 종교, 사유의 여정을 함께할 수 있는 심오한 여행지다.
결론
바쿠는 단순한 수도나 항구 도시가 아니다. 그것은 시간과 공간, 문화와 문명이 교차하며 형성된 살아 있는 거대한 예술작품과도 같은 공간이다. 구시가지에서 마주하는 고대 도시의 흔적, 신도시에서 감탄을 자아내는 현대 건축물, 불의 전설이 서려 있는 자연 경관까지—바쿠는 여행자에게 끝없이 변화하는 풍경과 감동을 선사한다.
이 도시는 유럽과 아시아, 이슬람과 기독교, 고대와 미래가 동시에 숨쉬는 드문 장소이며, 각각의 문화가 충돌하지 않고 아름답게 공존한다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바쿠를 찾는 것은 단순히 지리적 이동이 아닌, 세계사를 체험하고, 문명의 다양성을 체감하며, 나아가 삶의 깊이를 재발견하는 여정이라 할 수 있다.
한편으로 바쿠는 정제된 도시의 아름다움 속에서도 따뜻한 인간미를 품고 있다. 골목마다 들리는 음악, 현지인의 환대, 전통 음식의 풍미, 시장의 활기찬 소란 속에서 여행자는 이 도시와 진심으로 교감하게 된다. 그래서 바쿠는 단순히 다녀오는 도시가 아니라, 다시 오고 싶은 도시로 남는다.